()은 금메달 수
구분 | 남자(8) | 여자(7) | 금메달 합계 |
---|---|---|---|
역도(15) | 8 | 7 | 15 |
역도경기는 극한의 중량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 힘을 겨루는 스포츠로 웨이트리프팅이라고도 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삼손의 이야기라든가, 괴력(怪力)을 지닌 사나이들이 작은 바위나 큰 통나무 들어올리기를 겨루었다는 이야기 등 오늘날 역도경기의 원형은 유사(有史)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독일에는 힘자랑으로 돌 던지기가 있었으나, 이와 같은 돌 던지기나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기와 같은 경기는 힘겨루기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고대 올림픽경기에도 서로 맞붙어 싸우거나 때리는 격투기와는 별도로 중량물을 사용해서 힘을 겨루는 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독립된 경기방법은 없었고 육상경기장에서 역도경기가 행하여졌고, 육상경기 프로그램의 일부, 또는 체조경기의 일부로서 진행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1920년의 제7회 대회에 역도경기 그 자체가 독립하여 실시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역기(力技)라고 하였으나 8·15광복 이후부터 역도라고 개칭하였다. 역도가 대한민국에서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28년 2월 24일 중앙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기독교청년회) 체육부가 개최한 제1회 서커스대회에서 역기를 즉석 프로그램으로 넣어 7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겨룬 것이 최초였다.
해방 이후 초창기 우리나라 역도는 황금기였으며, 김성집 선수가 1948년 올림픽 최초 메달을 획득하였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대회 이후 차츰 경기력이 향상되어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Barcelona) 올림픽경기대회에서 52kg급 전병관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2008년 제29회 북경 올림픽경기대회에서 장미란, 사재혁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1869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대회에서는 역도가 체조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 졌는데 그 종목은 한손에 의한 저크와 두 손에 의한 저크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현재와 같은 체급도 없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대회 부터 독립된 경기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에는 5개 체급으로 나누어 체중 별로 경기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1928년 제 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양손에 의한 프레스(추상), 스내치(인상), 저크(용상)의 세 종목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추상 종목은 1973년부터 폐지되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이후 역도는 아시아경기대회 정식 종목이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카자흐스탄, 이란, 대한민국, 태국 등이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구분 | 금메달 | 은메달 | 동메달 |
---|---|---|---|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 | 1 | 1 | 4 |
제15회 도하아시아경기대회 | 0 | 4 | 4 |
제16회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 | 1 | 2 | 2 |
역도경기는 가로, 세로 12m, 높이 50~70cm 무대 위에 가로, 세로 4m, 높이 15cm 미만인 경기대에서 진행된다. 선수에게는 인상종목과 용상종목에서 각 3차시기가 주어지며 최고의 중량을 성공하는 선수가 승리하게 된다. 동 기록, 동 체중일 경우 체중이 가벼운 선수가 승리하게 되며, 동 중량일 경우에는 기록을 먼저 수립한 선수가 승리하게 된다. 선수에게 중량을 들 수 있는 시간은 각 시기마다 1분이 주어지며 계속해서 같은 선수가 도전할 경우에는 2분이 주어진다. 각 시기별 도전하고자하는 중량을 미리 통보요원에게 신청하여야 하며 각 시기 2번의 수정 신청기회가 주어진다. 이는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 중 호명이 된 후 30초 이내에 변경신청을 하여야 한다. 판정은 중간 주심 1명, 좌우 부심 각 1명이 결정하며, 3명 중 다수의 판정에 의해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심판 뒤에 배심 5명이 판정을 심판하며 심판의 판정이 부정할 경우 번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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